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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하지 않는 국가가 공모자

잘못된 메시지 던지는 가정폭력 관련법, 처벌 불원·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도를 전격 폐지하고 ‘의무체포’ 도입해야
등록 2021-12-22 23:07 수정 2021-12-23 11:01
2021년 12월10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가정폭력 생존자가 직접 만드는 공연 <마음대로, 점프!> 리허설을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2021년 12월10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가정폭력 생존자가 직접 만드는 공연 <마음대로, 점프!> 리허설을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가정폭력 피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가족이라는 친밀성, 그리고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 ‘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가정폭력을 사소한 개인사로 치부해온 뻔뻔스럽고도 낡은 편견이 이토록 오래도록 맹위를 떨치는 것은 이 범죄의 압도적인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나쁘고 폭력적인 남성을 알아보지 못했거나, 그런 그를 좋아한 어리석은 자, 그래서 안타깝지만 현명하지 못한 자, 남성을 끝내 달래지 못한 자, 혹은 그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어떤 일을 저지른 자로 호명되는 여성들. 여성을 삶의 주체, 자율성과 자유를 향유할 권리가 충분한 자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가정폭력 피해자는 죽어서도 비난받는다.

피할 수 없는 장소에서 24시간 범죄에 노출

가정폭력은 가장 잔인한 범죄 중 하나지만 가장 경미한 범죄로 여겨진다. 그러나 친밀한 자가 범인임은 피해자가 24시간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고, 집이 범죄 발생 장소라는 것은 피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천둥과 벼락, 우박이 쏟아질 때 몸을 피하려 서둘러 돌아가는 곳, 노동으로 지친 몸을 누이는 곳, 밖에서 받은 서러움과 모멸감을 위로해줘야 할 친밀한 자와 함께 사는 공간에서 바로 그 친밀한 자에게 살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사회가 이 범죄를 범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지표는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22만2046건이다. 가정폭력을 경찰에 신고하는 비율이 2.3%에 그친다는 조사1를 고려할 때, 실제 발생하는 가정폭력은 훨씬 더 큰 규모임을 유추할 수 있다. 2020년 가정폭력으로 검거된 5만2128명 중 335명이 구속돼 구속률은 0.64%에 그친다. 2016년 구속률 1.52%에서 절반 이상 줄었다.

가정폭력이 처벌받지 않는 범죄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처벌 불원’ 때문이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9조 제2항은 피해자가 처벌을 희망하지 아니하는 명시적 의사표시를 하거나 처벌을 희망하는 의사표시를 철회한 경우 가정폭력사건을 형사처벌이 아닌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함을 규정하고 있다. 가해자 처벌 여부를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이 조항은 ‘피해자 의사 존중’이라는 매우 그럴듯한 사유로 포장됐지만 실제로는 피해자를 더 취약하게 한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협박, 회유, 조종함으로써 자신의 면책을 결정하는 전권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특례법 제9조의 2는 상담을 조건으로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기소를 유예하는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를 규정하고 있다.

언제 이렇게 여성의 말을 믿었던 적이 있던가? 범죄 공포에 대한 여성들의 두려움을 ‘페미 망상’이라 조롱하고 여성의 피해 진술을 거짓말이라 몰아세우고 무고죄를 엄포하는 사회에서 단 한 차례의 망설임도 없이 곧이곧대로 여성의 말을 믿고 신뢰할 때가 있다. 바로 범죄 피해 여성이 가해자에 대해 처벌 불원을 할 때다.

가정폭력으로 숨진 여성을 추모하고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집회 현장. 한겨레 이종근 선임기자

가정폭력으로 숨진 여성을 추모하고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집회 현장. 한겨레 이종근 선임기자

다른 나라였다면 최장 5년 중범죄

형사처벌이 무마돼 가정폭력처벌법에 의해 상담위탁 보호처분 결정을 받은 이들의 폭력 정도를 살펴본 조사2에 따르면 가정폭력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사정없이 마구 때리거나’(39.1%), ‘피해자를 흉기로 위협하거나’(21.9%), ‘피해자를 담뱃불로 지지거나 흉기를 휘두르거나’(21.4%), ‘피해자를 물건(혁대, 몽둥이, 골프채)으로 때린 것’(14.1%)으로 조사됐으며 그런 행위의 대가로 형사처벌이 아닌 상담을 받고 있었다.

이들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가정폭력범죄를 저질렀다면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마주했을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형법(Penal Code) 제273.5조는 배우자, 동거인, 데이트 상대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에 대한 신체적 폭력을 불법으로 규정하며, 그 피해의 경중과 관계없이 처벌한다.3 예를 들어 상대방의 팔을 비틀어 멍자국이 생기거나 발로 차거나 때려서 골절상을 입히면 최장 4년의 징역형, 또는 6천달러의 벌금 또는 징역과 벌금형이 병과(동시에 둘 이상의 형벌에 처함) 처분된다. 이전에 상대를 밀치거나 침을 뱉는 행위 등 비교적 가벼운 폭력행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자가 7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또다시 가정폭력범죄를 저질렀다면 최장 5년의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다. 영국 형법은 가정폭력으로 상대에게 신체적 상해를 입히면 최장 5년형, 의도적 범죄행위로 상대가 상해를 입었으면 최장 무기징역형을 선고한다. 눈여겨볼 것은 상대를 폭력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는다면 최장 5년형을 선고하도록 한 대목인데4 중범죄법(Serious Act) 제76조를 개정해 신체적 폭력이 없는 강압적 통제 행위를 중범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형사처벌하고 있다. 또한 양형위원회는 법원이 형량을 결정할 때 ‘가정’이라는 맥락을 고려하도록 하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가족관계임을 참작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경계하고 가정 내에서 발생한 범죄를 특별히 심각하게 다룰 것을 주지시키려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신체적 폭력, 성폭력, 스토킹, 협박 등과 같은 범죄가 가족구성원 사이에 일어나면 가중처벌하고 있다.5

가해자 동정, 피해자 비난의 메시지

외국 사례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신체적 폭력이 없는 통제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입법을 서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강압적 통제 행위를 범죄화하는 것으로 ‘가정폭력, 아내학대의 본질이 통제 행위에 있다’는 관련 연구자들의 주장을 수용한 결과다. 가정폭력 가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보다 우월하다는 인식 속에서 상대의 행동을 통제하려 들고, 상대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상대를 자기 방식대로 조종할 권한과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결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결별 이후에 피해자를 살해하는 행위는 자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에 대한 처형 행위이다.

가정폭력을 중대한 범죄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정폭력, 아내학대, 데이트폭력 같은 범죄에서 분노조절을 하지 못한 가해자의 성정을 안타까워하거나 분노를 유발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은 문제 해결의 대안도 아니고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도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정폭력 관련 법이 시행된 지 2021년으로 23년째다. 관련 법이 가정폭력 가해자를 제재해 재범을 막고 피해자를 보호한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오히려 법을 통해 잘못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가정폭력 가해자를 제재하는 것은 사실상 직접적인 피해자 보호 정책이다. 여기서 실패하고 있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처벌 불원,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도를 전격 폐지하고 ‘의무체포’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미국 뉴욕주의 의무체포제도를 간략히 살펴보면, 경찰은 가정폭력 현장에 출동해 ‘반드시’ 가해자를 체포해야 한다. 경찰이 피해자에게 가해자 처벌 의사를 묻거나 화해나 조정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는 체포 이후 법원의 결정에 따라 석방, 보석, 교도소 수감이 결정되며, 석방이나 보석으로 풀려난 경우에는 법정 출석 기일이 통보된다. 접근금지 명령 위반시 경범죄 판단을 받으면 1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지만, 중범죄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면 징역 7년형에 처해진다. 피해자가 안전한 주거지로 옮기는 과정에서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 오는 동안 경찰이 동행한다. 2021년 9월 가정폭력으로 이혼소송 중이던, 아이들의 겨울옷을 챙기러 집에 가면서 친정아버지와 동행했던, 남편이 휘두른 1m 일본도에 무참히 살해된 그 여성이 여기 한국이 아닌 뉴욕주에 거주했다면, 그는 지금 자녀들과 함께 고단했던 한 해를 위로하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처벌하지 않는 국가도 공모자

가정폭력 범죄자가 공권력을 마주하고 사법시스템을 경험할수록 자신의 폭력적 행위를 질타받고 비난받고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고 처벌 불원을 하지 않은 피해자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면 이것은 국가가 초래한 위험이다. 가정폭력을 처벌하지 않는 국가는 공모자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공동저자

1. 여성가족부, ‘2019년 가정폭력 실태조사’, 2019
2. 한국가정법률상담소, ‘2020년 가정폭력 행위자 상담통계’, 2021
3. California Legislative Information ‘Penal Code:Chapter 2’, https://leginfo.legislature.ca.gov/faces/codes_displaySection.xhtml?lawCode=PEN§ionNum=273.5
4. BlaserMills Law, ‘New Sentencing guidelines could lead to harsher punishment for domestic abuse crimes’, https://www.blasermills.co.uk/new-sentencing-guidelines-could-lead-to-harsher-punishments-for-domestic-abuse-crimes
5. Government of Netherlands, ‘Domestic exclusion order and sentencing for domestic violence’, https://www.government.nl/topics/domestic-violence/domestic-exclusion-order-and-sentencing-for-domestic-violence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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